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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품은 건축 -건축물을 통해 보는 대전의 과거와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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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품은 건축

역사를 품은 건축

-건축물을 통해 보는 대전의 과거와 현재 

 

  역사란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을 이야기 합니다. 기록은 글자로 남을 수도 있지만, 건축물이 그 자체로 기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역사는 책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축물을 통해서도 우리는 역사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도시의 역사는 국가의 역사보다 깊습니다. 대전 또한 오랜 역사공동체입니다. 역사 공간으로서의 대전의 역사는 길지만, 도시로서의 대전의 역사는 20세기 초에 시작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20세기는 일본의 침략과 민족끼리의 전쟁, 민주화운동, IMF 경제위기 등 격랑의 시간이었습니다. 대전은 여느 곳보다 이 고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살아냈습니다.

  대전의 역사는 철도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철도는 근대화의 주역이자 상징입니다. 철도의 등장은 사람들의 시공간에 대한 인식과 기존의 도시체계를 뒤바꿔놓은 혁신적인 신식 문물이었습니다. 철도의 부설로 인해 발달한 지역이 여러 곳 있지만, 그 중에서도 대전은 경부선과 호남선을 갖추면서 극적인 성장을 이루며 한밭이라고 불릴 만큼 넓은 밭의 도시에서 오늘날의 대도시로 탈바꿈하였습니다대전은 1898년 일본이 경부선철도부설권을 따냈을 당시의 노선계획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었지만, 결국엔 철도의 도시로 비약적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러시아와 전쟁을 준비하던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빨리 공사를 마무리 지어야 했는데, 그래서 보수성과 지방색이 적은 지역으로 대전이 선택된 것입니다.

  1910, 경술국치로 우리나라가 국권을 완전히 빼앗겼을 때, 일제는 회덕에 있던 군청을 대전, 곧 지금의 원동으로 옮겼습니다. 조선의 전통과 성리학적 질서가 팽배했던 회덕은 일제가 식민통치를 펼치기에 불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일본인들이 들어온 이후에도 전통의 파괴라 할 만한 일이 많지 않았었습니다.

 

소제동 철도관사촌 ⓒ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 박종우 

소제동 철도관사촌 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박종우

 

  반면 중국 쑤저우(蘇州) 지방의 한 호수에 비교할 만큼 경관이 아름답다고 해서 명명된 소제호(蘇堤湖) 주변, 현 소제동의 변화는 매우 극적이었습니다. 회덕군에서 가장 큰 연못으로, 전통적인 배산임수 지역이었던 이곳에 1907년 일본 거류민회가 신사를 세우면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1927년 치수사업으로 소제호를 매립한 뒤, 그 부지 위에 철도 관리자 및 노동자들을 위한 대규모 관사촌이 형성되면서, 전통적인 마을공동체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일련의 개발을 겪으며 관사촌의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고, 현재 관사촌에서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간직한 것이 약 40여 채 정도입니다. 그 외에 다소 개조되고 변형된 것들까지 포함하여 좀 더 많은 건물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며 현재까지 남아있습니다.

 

 

소제동 철도관사촌의 일식가옥 ⓒ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 박종우 

소제동 철도관사촌의 일식가옥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 박종우

 

  소제동의 철도관사촌은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규모의 관사촌입니다. 철도관사촌이 정도 규모로 남아있는 사례는 소제동이 거의 유일합니다. 최근 소제동 철도관사촌의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부각되면서 대전역을 들린 여행객들이 자주 찾아오기도 합니다. 철도관사촌의 길을 걷다보면 쪽으로 늘어진 집들이 보입니다. 하나의 집이 내부가 대칭인 세대의 가구로 이루어진 형태가 보편적입니다. 지붕이 높고 길이가 길어 바깥에서 보아도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한옥구조가 아님을 있습니다. 다다미방의 흔적이나 담장위로 높게 솟은 삼각형 지붕을 보아 일본식 가옥의 요소를 간직하고 있음을 있습니다.

 

?소제동 소제관사 42호 ⓒ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 박종우

소제동 소제관사 42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 박종우

 

  ‘솔랑시울길이라는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면 42 관사가 나타납니다. 이곳은 대전 근대아카이브에서 운영하는 문화공간으로, 소제동의 마스코트 같은 역할을 하며 지역민들을 위해 정기 음악회, 문화공연 등을 개최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잊히기 전에 소제동에서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노력이 담긴 공간이라고 있습니다. 

 

소제동 철도관사촌 골목(좌)과 나무전신주(우) ⓒ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 박종우

소제동 철도관사촌 골목() 나무전신주() 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박종우

 

  솔랑시울길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면 미로처럼 얽혀있는 골목들이 나타납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까지 집을 허물지 않고 공간이 되는대로 조금씩 개조하고 터를 넓혀 고친 흔적들이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나무로 전신주가 아슬아슬하게나마 아직까지 남아있습니다. 전봇대도 과거엔 근대화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해내었지만, 시대가 변해 현대에 와서는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잠재적인 제거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소제동에는 곳곳에 역사의 흔적과 변천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구 충남도청사 ⓒ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 박종우 

구 충남도청사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 박종우

 

  소제동 철도관사에서 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충남도청사가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은 공주에서 대전으로 충남도청사를 이전하며 건축되었습니다. 대전의 충남도청사는 세워진 70년이 넘은 건물로, 해방 이전 건축된 도청사 중에서 원형을 간직한 되는 건축물입니다. 충남도청사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한국전쟁 중에는 군정청, 임시중앙청, 전방지휘사령부, 육군본부 등으로, 이후에는 충청남도 행정의 중심으로 역할을 해내었고, 근대에서 현대까지의 대전을 현장에서 지켜본 역사의 흔적입니다. 자체로도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상당하기에 현재 등록문화재 18호로 지정되어있습니다. 

 

충남도청사 중앙계단(좌) 복도(우) ⓒ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 박종우

충남도청사 중앙계단() 복도() ⓒ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 박종우

 

  도청 건물 중앙의 입구로 들어서면 왼편에는 대전 근현대사전시관이 위치해있고, 안으로 들어서면 길게 뻗은 복도와 2층으로 이어지는 중앙계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1100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을 했던 영화 <변호인>에서 법정 장면과 다수의 장면들이 이곳에서 촬영되어 유명세를 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기도 하였습니다 도청사는 당시의 건축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데, 당시 유행한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화려하거나 정교한 장식을 배제하고 절제된 수수한 형태미를 추구합니다. 때문에 당시의 건축양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건축사적 의미가 큽니다.

 

스크래치벽돌(좌) 창문 창호철물(우) ⓒ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 박종우

스크래치벽돌() 창문 창호철물() ⓒ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 박종우

 

  고풍스런 장식, 높게 솟은 창문과 투박한 샹들리에도 독특하지만 외벽의 벽돌 모양이 유독 눈길을 끕니다. 건축 당시의 벽돌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으로, 1930년대에 유행했던 붉은 스크래치 벽돌이라고 합니다. 창호의 개방정도를 조정하여 상태를 유지하도록 만든 하단부의 고정철물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충남도청사만의 독특한 장치로 청사를 찾은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둡니다내부에는 2012년까지 도지사실로 쓰였던 공간이 시민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전시실로 이루어진 방들에서는 대전의 역사적 사건과 명문가, 의병활동 등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있습니다.

 

대전 근현대사 전 현수막 ⓒ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 박종우

대전 근현대사 전 현수막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 박종우

 

  충남도청사 내부에서 홀리듯 근대로의 시간 여행을 하다보면 기획전시실에서 고정적으로 열리고 있는 대전 근현대사 근대도시 100년의 역사라는 현수막이 눈에 띕니다. 전시실에는 경부선 철도 개통으로 근대 도시로 거듭난 대전의 성장과정과 도시화 과정, 대전의 역사, 대전 출신의 독립투사, 한국전쟁 당시의 자료 등이 상세히 전시되어 있습니다.

 

대전 은행동의 목척교 ⓒ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 박종우

대전 은행동의 목척교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 박종우

 

  소제동 철도관사와 충남도청 중간 , 대전의 동과 서를 이어주는 목척교가 위치해 있습니다. 오늘날의 목척교는 이렇게 화려한 모습이지만 100 지금의 목척교 자리에는 징검다리가 있었는데, 다리가 대전천의 유일한 건널목이었다고 합니다. 징검다리에서부터 목척교 명명의 유래가 전해집니다. 옛날 아침저녁으로 이곳을 오가던 새우젓 장수가 징검다리 가운데에 지게를 받쳐놓고 쉬고는 했는데, 받쳐놓은 지게가 나무로 만든 (木尺) 같다고 하여 목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유력합니다목척교가 처음 가설된 것은 1912년인데, 대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수비대의 병기를 수송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당시엔 나무다리로 축조되었고, 목척교가 아닌 대전교라고 불렸습니다. 이후 1932년에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되며 콘크리트 다리로 다시 건설되었고, 해방이 되며 다시 목척교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대전 은행동의 목척교 ⓒ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 박종우

대전 은행동의 목척교한민족 정보마당 ‘한다솜이’ 박종우

 

  한국전쟁 당시에 부산의 피난민들이 영도다리에서 헤어진 가족을 찾아다녔다면, 목척교는 전국 각지에서 대전에 모인 피난민들의 만남을 기약하는 장소였습니다. 1962 당시 인기가수였던 안다성의 노래 잊을 대전의 배경으로 등장할 만큼, 목척교는 오랜 세월동안 대전하면 떠오르는 상징으로 자리매김 해왔습니다1973 대전천 복개공사로 잠시 동안 다리로서의 모습을 감추었었으나, 생태하천을 살리고자하는 대전천 복원사업으로 중앙데파트와 홍명상가를 철거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목척교는 대전의 지리적·풍수적 특징을 담은 근현대의 역사와 함께 공존하는 장소라고 있습니다.

  대전은 대전 사람들조차 별로 특징이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느 곳이나 그렇듯이 속을 파헤쳐보고 들여다봐야 곳만의 가치가 보이고 새로운 것들이 보이는 법입니다. 대전의 역사가 근대에 시작된 만큼 대전은 우리나라 근현대의 역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기록물로서가 아닌 건축물과 지역 속에 담겨있기 때문에 찾아내고 알아가는 과정이 더욱 흥미롭습니다평소에 아무 관심 없이 지나쳤던 곳일지라도, 다시 살펴보면 곳도 자신만의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속에 담겨진 이야기를 파헤치다보면 어린 시절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보따리를 발견할 있을 것입니다. 

 

 *참고자료

문화재청 www.cha.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