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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국보/보물)

1464년(세조 10)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가 학열(學悅), 학조(學祖)와 함께 세조의 수복강녕(壽福康寧)을 위하여 강원도 오대산의 상원사를 중창(重創)하면서 널리 시주(施主)를 모으기 위해 쓴 <권선문(勸善文)>과, 세조가 그 일을 돕기 위하여 물자를 내려보내면서 쓴 이른바 <어첩(御牒)>을 함께 필사하여 첩장(帖裝)한 책이다. 언해본 1첩(32면)과 한문본 1첩(66면)의 도합 2책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유일본으로 현재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 보물 140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1997년 1월 1일부로 국보 292호로 등급이 조정된 귀중한 문화재이다. 책의 크기는 31.1×12.3㎝인데, 표지는 당초문(唐草紋)의 붉은 비단으로 싸여 있다. 용지 또한 두껍고 윤기있는 장지(壯紙)를 사용하였다. 본문의 각 면은 상하쌍변(上下雙邊)에 계선(界線)이 그어져 있다. 변란(邊欄)의 크기는 24.5×12.2㎝, 매면 행수는 6행으로 일정하나 행당 자수는 13자-18자로 출입이 있다. 책 장의 접힌 부분이 마모되어 부분적으로 보수한 데가 있으나 보존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언해본의 표제(表題)에 ‘御牒’이라 쓰여 있고, 또한 세조의 글이 실려 있는 점에서 이 자료를 ‘오대산어첩’, ‘대산어첩’, ‘상원사어첩’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세조가 쓴 <어첩>의 내용도 권선문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므로 신미 등이 쓴 <권선문>의 권수제인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 또는 줄여서 ‘상원사중창권선문’을 대표 서명으로 삼는 것이 더 합당하다(다만, 여기서는 편의상 신미의 글은 <권선문>으로, 세조의 글은 <어첩>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로 한다). 신미의 <권선문>은 그 글의 한문 원문 말미에 “天順八年(1464) 臘月十八日”이라 명기(明記)되어 있으므로 1464년(세조 10) 12월 18일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으나, 세조의 <어첩>에는 아무런 연기(年記)가 없다. 흔히 세조의 <어첩>을 받고 난 뒤에 신미 등이 <권선문>을 쓴 것으로 이해하여 왔으나, 실제로는 세조의 <어첩>이 더 나중에 이루어진 것임이 최근의 연구에서 밝혀졌다. 즉, 세조가 상원사 중창을 위하여 여러차례 물자를 내려준 기록이 《세조실록(世祖實錄)》 등에 보이는데, 그 가운데 1465년(세조 11) 2월 20일(정유)의 실록기사에 상원사에 보내라고 명한 정철(正鐵), 미(米), 면포(綿布), 정포(正布) 등의 물목(物目)이 <어첩>에 기록된 물목과 수량까지 정확히 일치하므로 이 무렵에 <어첩>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책이 필사된 시기는 한문본 <어첩>의 권말에 기명(記名)된 관료들 가운데 호조판서의 직함으로 서명한 김국광(金國光)이 1465년 4월 4일자로 체직(遞職)된 사실을 고려하면 적어도 이 날짜 이전에는 필사가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현전본에서 위의 두 글이 필사된 순서에 있어서도 신미의 <권선문>이 먼저 실리고, 세조의 <어첩>이 그 뒤에 연속하여 실려 있는 점은 이 글들이 지어진 순서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신미의 <권선문> 뒤에 세조의 <어첩>을 함께 수록함으로써 세조가 종친과 관료들과 함께 이 불사(佛事)에 대해 찬조, 후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효과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언해본과 한문본의 본문 내용은 일치한다. 후자가 한문만으로 되어 있는 데 비해, 전자에는 한문 뒤에 계속하여 언해문이 함께 실려 있는 점이 다르다. 또 한 가지의 차이는 <어첩>의 본문 뒤에 서명한 수희공덕주(隨喜功德主)들의 명단이다.(<권선문>에는 한문본에만 신미 등의 서명이 있고 언해본에는 서명이 없다). 한문본의 공덕주(功德主)가 세조, 세자, 종친, 관료들로 모두 남성인데 비해, 언해본은 세조, 왕비, 세자, 정빈(貞嬪), 공주(公主), 부부인(府夫人), 정경부인(貞敬夫人), 정부인(貞夫人) 등으로 되어 있어, 한문본과 중복되는 세조와 세자를 제외하면 모두 여성인 셈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한문본과 별도로 언해본을 따로 만든 중대한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문자 생활에 있어서 관료인 남성들은 한문본만으로도 그 내용을 이해하기 충분하였겠지만,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外命婦)의 여성들에게는 <어첩>(실제로는 세조의 권선문)의 내용을 좀더 쉽게 알려주기 위한 배려로 언해문을 덧붙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글 창제 이후 약 20년 안팎의 기간이 지난 뒤의 한글 사용자 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의 언해본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 필사본(筆寫本)이라는 점에 있다. 본문의 체재에 있어서도 특기할 점이 많다. 언해본의 한문 원문에는 구결이 달려 있지 않다. 그에 따라 번역문도 원문 자구(字句)에 크게 얽매이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문장의 호흡도 길다. 언해문은 국한혼용(國漢混用)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의 일반 언해본과는 달리 한자에 한글 독음(讀音)이 달려 있지 않고, 한글 글자의 크기와 1행당 글자수도 한문 원문과 똑같다. 같은 시기에 간행된 간경도감판(刊經都監版) 불경언해서들에서 언해문이 한문 원문과 달리 쌍행의 작은 글자로 실리는 것에 비하면 특이한 체재라 할 수 있다. 언해문에는 글자를 보정(補正)한 곳이 많이 보인다. 잘못 적은 글자를 오려내고 뒤쪽에 종이를 붙여 그 위에 새로 적어 넣는 방식의 교정으로 당시의 일반적인 교정 방식의 한 가지이다. 사진이나 영인본에서 그것을 구별해내기는 쉽지 않으므로 여기에 모두 제시한다. 괄호 속이 오려붙인 교정으로, 총 7군데 8글자이다. [父母? 목수? (칠) ?리오(13.5), 善知識? 모(?)릴 引導? ?리(시)니(14.1), 오(?)(단, 받침 ‘?’만 보정) (나리) 잇게 ?니(14.6), 눗므(리) 그지 업다니(16.1), 날 爲?야 오? 다 (?)라(16.3)] 전체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은 점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많은 수의 보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보정은 세조의 <어첩> 부분에만 나타난다. <권선문>에도 명백한 오자가 있으나(“뉘 갑?올 ?디 업스리오마?”(5.6-6.1)에서의 ‘?’은 ‘?’의 잘못이다.), 교정에서 누락되어 있다. <어첩>을 언해한 사람이나 필사한 사람의 잘못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특히 한문 원문이나 언해문의 한자에는 전혀 오자(誤字)나 보정이 없는 반면 한글에서만 이러한 오자와 그 보정이 있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한글 보급의 초기 단계에서 중앙 관료들에게는 한글이 아직 익숙한 문자 체계가 아니었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다. 한글의 자형(字形)도 주목할 만하다. 필사본인 이 책의 한글 글자체는 같은 시기에 간행된 판본(版本)의 글자체와 사뭇 다르다. 이 책에서 ‘ㅅ, ㅈ’ 등의 삐침획과 ‘ㅏ, ㅓ, ㅣ’ 등의 세로획 끝은 뾰죽하게 되어 있어, 둥글게 마무리되어 있는 목판본의 글자체와 대조된다. 또한 ‘ㅐ, ㅔ’ 등의 두 세로획이 목판본에서는 길이가 같으나, 여기에서는 뒤의 세로획이 더 길게 되어 있다. ‘ㅍ, ㅎ’ 등의 자형 또한 당시의 목판본보다는 훨씬 후대의 판본 글자체에 가까운 모양으로 되어 있다. 결국, 현대의 자형에 더 가까워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당시의 필서체와 인쇄체 사이에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음 단계에서의 인쇄체 글자형을 앞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표기법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은 각자병서(各字竝書)의 사용이다. 국어사자료에 있어 각자병서는 1465년 3월에 간행된 《원각경언해(圓覺經諺解)》에서부터 전폐(全廢)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는 ‘-ㄹ’ 동명사형 어미(‘-ㄹㆆ’으로 표기된 예는 없다) 뒤에서 각자병서가 사용된 용례가 나타난다. 다만, <권선문>과 <어첩>에서의 사용례가 서로 차이를 보이는 점이 흥미롭다. <권선문>은 ‘? 꺼슬’(7.8), ‘홀띠니라’(9.6)로 표기된 데 비해 <어첩>은 ‘? 거슬’(17.2), ‘닐올디’(17.1)와 같이 ‘ㄹ’ 동명사형 뒤에서 ‘ㄱ, ㄷ’의 단일 초성만을 보여준다. ‘ㅅ’의 경우는 ‘??’(권선문 7.4), ‘이럴?’(어첩 17.1)처럼 동일한 환경에서는 모두 나타난다. 용례가 그리 많지 않아 속단할 수는 없지만, 두 언해문 사이에 각자병서의 사용에 있어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문법형태에서 눈에 띄는 것은 모음조화와 관련된 이형태(異形態)들의 출현 양상이다. 주제표지는 ‘-ㄴ/?/?’으로만 나타나고, ‘-은/는’은 사용되지 않는다[五臺?(6.3), 님금?(13.6)]. 대격 조사는 <권선문>에서는 ‘??’(6.6), ‘뎌를’(7.4), ‘목수믈’(8.3)과 같이 모음조화가 지켜진 형태로 표기되나, <어첩>에서는 ‘목수?’(13.5), ‘뎌?’(16.3) 같은 반칙례가 자주 보인다. 이 책의 가치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은 본문 말미에 공덕주로 서명한 사람들의 수결(手決)이다. 특히 한문본의 말미에는 종친, 관료 등 200여명의 직함(職銜)과 수결이 보인다.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의 관료 대부분이 기명(記名)과 수결을 한 셈이다. 간혹 직함만 있고 수결이 누락된 경우나 중복된 수결도 나타나지만, 15세기 중엽의 중앙 및 지방 관료의 수결이 여기서와 같이 한 책에 함께 나타나는 일은 없다. 더욱이 실록이나 방목(榜目) 등에 의해 수결 당사자의 실명(實名)이 확인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한국사 연구나 고문서(古文書)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일제시대부터 그 일부가 영인된 바 있고, 월정사에서도 1970년대에 원척으로 영인하여 관광기념품으로 판매한 적이 있으나, 원본과 달리된 부분이 있어 이용시 주의하여야 한다. (이호권) ①참고문헌 金武峰(1996), 上院寺 <御牒> 및 <重創 勸善文>의 국어사적 고찰, 東岳語文論集 31, 東岳語文學會. 安秉熙(2001), 上院寺重創勸善文에 대하여, 韓日語文學論叢(梅田博之敎授古稀記念), 태학사. 崔範勳(1985), 五臺山 上院寺 御牒 重創勸善文에 대하여, 國語文學 25(一山 金俊榮 先生 停年紀念號), 전북대 국어국문학회. ②관련항목: 상원사중창권선문, 상원사어첩, 오대산어첩, 대산어첩 ③키워드: 월정사(月精寺), 권선문(勸善文), 어첩(御牒), 국보 292호, 첩장(帖裝), 장지(壯紙), 필사본(筆寫本), 보정(補正), 수희공덕주(隨喜功德主), 공덕주(功德主), 각자병서(各字竝書), 수결(手決) ③원전보기: [월정사 소장 원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