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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대 전희정 자문교수가 추억하는 “나의 스승, 한희순 상궁”

그야말로 ‘먹방’과 ‘쿡방’의 시대다. ‘미식美食’이나 ‘식도락食道樂’과는 분명히 다른 양상. 음식의 영역에서, 미디어를 소비만 할 줄 알던 세대와 미디어를 만들 줄 아는 세대 사이의 간극은 꽤 크다. ‘음식을 배우는 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요즘은 음식 배우는 게 참 쉬워졌어요. 음식 만들기를 가르쳐주는 방송 프로그램도 넘쳐나고
블로그 몇 개만 찾아보면 웬만한 음식은 다 나와 있으니까.
나도 가끔 방송 보면서 유행하는 음식을 배우곤 하지. 그러니 누가 일부러 학교까지 찾아와서 배우려고 하나

달라진 세태를 인정하지만,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노교수다. 조리법 몇 줄, 영상 몇 분 안에 좋은 음식의 ‘맛과 맵시’를 모두 담아낼 수는 없다. 진정한 전수傳受는 재료를 함께 다듬고, 양념을 섞거나 음식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스승에게 사사하던 방식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겠지만 가능하다면 무릎 맞대고, 눈 맞춰가며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은 맘인 것이다.

전희정 교수는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를 지근에서 모신 몇 안 되는 궁인 중의 한명인 한희순韓熙順 상궁에게 사사한 제자 중 유일한 생존자이다. 숙명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직한 후 국내 대학 유일의 한국 전통음식 연구기관인 한국음식연구교육원의 자문교수로 오랜 기간 후학들을 가르쳐왔다.

조선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는 흔히 윤비尹妃로 불리는 인물이다. 조선 제 27대 왕에서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로, 마지막에는 다시 왕으로 강등되었던 지아비를 따라 그 역시 왕비에서 황후로, 다시 왕비가 되어 생을 마감했다. 폐위된 후 지아비는 창덕궁에서 승하했지만 윤비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있는 낙선재樂善齋에서 생을 마감했다. 윤비는 근대 한식 조리서 중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두 권의 저자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1939년에 「조선요리법朝鮮料理法」을 펴낸 조자호는 윤비의 이종사촌 동생으로 궁을 자주 드나들었던 인물이며 1957년 「이조궁정요리통고李朝宮廷料理通考」를 펴낸 한희순은 40여 년 가까운 세월동안 윤비의 수라를 보살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식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최근 10년 동안 꽤 많은 이들이 한희순이라는 인물의 정체성에 대해 이러저러한 의견을 내놓는 글을 쓰고, 토론을 해왔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이자 조선시대 마지막 주방 상궁’이라는 수식어 때문이다. 혹자는 힘없고 가난한 조선 궁정의 음식은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고 주장한다. 고종과 순종이 드신 음식이 과연 제대로 된 궁중음식이기나 했겠느냐는 것이다. 또한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입궁한 한희순이라는 인물이 비슷한 나이의 윤비를 모시며 혼란기의 궁정에서 제대로 된 조리방법을 전수받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제대로 된 상을 차린 경험도 미천했을 것임이 분명하다는 얘기도 곁들인다.
한편으로는 맞고, 다른 한편으로는 틀린 말이다. 분명, 고종과 순종에게 올렸던 조석朝夕수라는 숙종이나 영조, 혹은 정조가 들었던 18세기의 궁중음식과는 달랐을 것이다. 세월이 100여 년 이상 흘렀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여 전자는 궁중음식이고, 후자는 궁중음식이 아니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종가宗家의 음식을 ‘한식의 화석’이라고 부른다. 수백 년을 내려오는 동안에도 그 원형이 잘 유지되는 경우가 많아서이기 때문이다. 왜일까. 죽은 이들을 위한 의례음식. 보여 지는 음식. 질서가 중요한 음식이었기에 대대손손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확실하게 전수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중음식의 경유, 크고 작은 궁중 연회나 행사의 준비 과정부터 행사의 마지막 마무리까지 꼼꼼하게 둔 의궤儀軌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을 통해 그 당시 궁중음식의 모습을 어림할 수 있지만 일상식의 모든 것을 다 기록해 두지는 않았다. 왕과 왕족은 물론이려니와 양반 관료, 궁인, 중인, 천민 기술자 등이 모두 궁중음식을 먹었다. 물론, 재료의 종류도, 조리법의 정교함도, 먹는 방법도 다양했다. 그러나 때로, 왕은 신하와 같은 음식을 나누기도 했고, 정조의 화성행궁 행차에서 보이는 것처럼 양로연을 베풀었을 때에는 푹 무르게 삶은 콩 같은 음식을 고을 노인들과 똑같이 들기도 했다.

특히 이조李朝가 끊어진지 사십여 년四十餘年이 지난 오늘에 있어 그 옛날의 궁정요리宮中料理의 전모全貌는 문헌文獻을 통해서나 또 사람을 통해서도 알 길이 희박稀薄한 형편形便이니 그 원인原因의 하나는 궁정宮廷내의 요리料理에 관하여 남긴 문헌文獻이 없다는데 기인基因하겠고 또 더욱이 이것이 구중심처九重深處에서 그 속의 몇 사람 간에만 돌려 구전口傳되었던 것이기에 이미 십여년四十餘年이 지나는 동안에 사람의 바뀜으로써 더욱 알 길이 희박稀薄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때를 다투어 이 일을 시작한 원인이 즉 여기 있었다. 그러나 이 사업事業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모으고 모은 귀중貴重한 자료資料는 六·二五로 그 대부분大部分이 분실紛失되어 중단中斷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던 때도 있었으나 그러나 다시 모으고 묻고 또는 기록에 남은 것 등을 다시 실지로 만들어보아 정확正確하게 정리整理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조종궁정요리통고」의 머리말中

한희순 상궁이 1957년에 펴낸 「이조궁정요리통고李朝宮廷料理通考」의 머리말 중 일부 내용이다. 조선 후기, 정국이 안정적일 때에는 전국 팔도에서 매일, 열흘, 한 달 단위로 수많은 진상품이 올라왔다. 애초에 조선시대에는 궁과 반가의 음식교류가 활발했다. 왕, 왕비, 대비, 세자 등의 전각에 진상된 물선이 한 자리에서만 소비되었으랴. 세자의 스승에게도 하사되었고, 왕비의 사가나, 공주의 시가에도 당연히 전달되었을 터. 세월의 흐름, 당대의 권력 향방에 따라 지방색도 가미되고, 특정 가문의 음식법이 스며들었다. 구한말 남루한 궁정에 똑같은 물선物膳이 제때 알맞게 도착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윤비는 당대의 세도가 윤택영尹澤榮의 여식. 가례를 올리고 입궁할 때 당연히 사가에서 함께 입궁한 궁인이 있었다. 그 중 한명인 김명길 상궁은 후에 「낙선재 주변樂善齋 周邊」이라는 책을 통해 윤비를 모시게 된 경위와 구한말 왕실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뒷이야기 등을 기술하고 있다. 고종, 순종, 윤비 등이 궁핍한 중에 어떤 음식을 들었는지도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순종純宗마마의 승하 후 대부분의 찬시贊侍, 무관들은 창덕궁을 떠났다. 이왕직李王職에서 주는 예산도 깎여서 그 많던 상궁과 생각시들도 궁궐밖으로 흩어져 나갔다. 내시, 무관들은 창덕궁을 떠났다. 8.15해방 이후에는 더욱더 줄어 樂善齋에만 불과 10여명이 남아 尹마마를 모셨다. 가례 때 80명이 모시던 것을 생각하며 몇명 남은 상궁들은 그때보다 더 정성스럽게 모셨다. 하루에 두차례 올리는 수랏상도 純宗마마가 살아계실 때와 다름없이 흰수라(흰밥), 팥수라, 조리개,계란조치, 생선조치, 삼합장과 등 한 가지도 빼지 않고 올렸다. 바깥은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낙선재 안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마마도 꽂꽂이 앉아 의연하게 팔만대장경을 읽으셨는데 변한게 있다면 엄격하던 상궁과 나인의 구별이 희미해진 것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자기 임무가 아니라고 버티는 일은 없었다.

김명길,「낙선재 주변樂善齋 周邊」中

1.창덕궁 주방 나인으로 시작해 후에 낙선재에 머물던 마지막 왕비인 윤비를 지근에서 모셨던 한희순 상궁 2.전희정 교수 사진

창덕궁 주방 나인으로 시작해 후에 낙선재에 머물던 마지막 왕비인 윤비를 지근에서 모셨던 한희순 상궁.
전희정 교수는 1956년도 숙명여자대학교에 입학해 한희순 상궁을 만나고 대학원 진학 후 조교 생활을 할 때까지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사사했다.

 

한희순 선생님이 택시를 타고 강의하러 오시는 날에는 학교 앞으로 마중을 나가는 사람이 정해져 있었지.
안국동에 있는 별궁에서 지내고 계셨거든.
선생님은 13세에 소주방燒廚房 소속으로 입궁을 해서 음식을 배우셨다고 해요.
1926년 이왕직李王職(일제 강점기에 이왕가와 관련된 사무 일체를 담당하던 기구)의 주방나인 월급명세서를 보면
소주방 소속 주방 나인의 수가 10명인데 45원부터 73원까지 직급에 따라 급료를 다르게 받았던 것을 알 수 있어요.
선생님은 급료로 54원을 받으셨죠.
궁 바깥의 사람들과는 말도 섞지 않는 궁인이었지만 숙명여자대학교가 왕실의 내탕금으로 설립된 곳이라 특별히 강의를 와주셨지.
고종의 후궁이었던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가 세운 곳이었거든

    1.전희정 교수가 숙명여자대학교 조교 시절 학생들과 실습을 하는 모습.  2.황혜성 선생이 출강하던 시절의 모습.

(왼쪽) 전희정 교수가 숙명여자대학교 조교 시절 학생들과 실습을 하는 모습. 가운데 흰색 가운을 입은 이가 전희정 교수이다.
(오른쪽) 황혜성 선생이 출강하던 시절의 모습. 검은색 옷을 입은 이가 황혜성 선생이며 그 옆이 전희정 교수이다.

전희정 교수가 추억하는 스승의 성품은 ‘검약’ 그 자체였다고 한다. 어떤 재료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활용했는데 파뿌리 하나까지도 깨끗이 씻어서 김치 담그는데 사용했을 정도였다. 암치포(말린 민어포)껍질이나 북어 껍질에 고기 양념을 펴서 프라이팬에 지진 다음 맑은 장국에 끓여낸 어글탕, 대추씨를 모아두었다가 찹쌀을 넣어 끓인 대추죽은 그런 지혜에서 나온 음식들이다.

나중에 선생님 기거하시는 별궁에 가보고서야 왜 그러시는지 알았지요. 작은 방 한 칸을 나눠서 다섯 명의 궁인이 어렵게 살고 계시더군요.
그 분들끼리는 서로를 마마님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선생님이라고 불렀어요.
수업 중에는 먼저 시범을 보이시고는 우리가 실습하는 동안 창가에 서서 멀리 관악산을 바라보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외곤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음식에 있어서는 타협 없이 완벽을 추구하는 스승 때문에 힘들었던 적도 많았다고 한다. 구절판을 만들 때도 애호박을 채쳐서 볶으면 쉬우련만 반드시 호박 귀퉁이를 눈썹 모양으로 얌전하게 썰어 볶지 않으면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두부전골 역시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고. 한입 크기로 썰어 지진 두부를 두 장 맞대고 그 사이에 양념한 고기를 끼운 후 데친 미나리나 쪽파로 돌려 묶어 모양을 내기란 그리 만만치 않은 작업일터. 일일이 돌려 묶기 힘들어 아래 부분의 미나리 끝을 슬쩍 밀어 넣었다가 들통이 나 혼난 적도 있을 정도라고.

    1.회갑례(1964년에 한희순 선생님과 조리실에서 상차림한 것) 2.한희순 선생님(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께서 1961년에 차린 9첩 반상

(왼쪽) 회갑례(1964년에 한희순 선생님과 조리실에서 상차림한 것)
(오른쪽) 한희순 선생님(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께서 1961년에 차린 9첩 반상

    전희정 교수가 조교로 있던 시절, 한희순 상궁을 도와 차려냈던 상차림

전희정 교수가 조교로 있던 시절, 한희순 상궁을 도와 차려냈던 상차림.

예전에는 국빈방문이 있어도 제대로 음식을 대접할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나라에 중요한 행사가 있거나 모임이 있으면 외국인 손님들이 학교로 많이들 왔지요.
많을 때는 오백 명 정도의 손님에게 대접할 음식을 밤을 새가며 만들곤 했어요.
족편, 갈비찜, 만두, 녹두전 등 하나같이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이었지.
변변한 조리도구도 없던 시절이라 힘은 들었지만 일은 많이 배웠지요. 한번은 유명한 작가 펄벅 여사가 한국에 왔어요.
그때도 한희순 선생님이 상을 차리시고 조교로 있던 저를 비롯해 학생 몇이 도왔지요.
낮은 교자상 위에 책상반 두 개를 얹어 놓고 12첩 반상을 차려 드렸지.
그런데 펄벅 여사가 구절판에는 손도 대지 않는 거예요. 너무 아름다워서 도저히 먹지 못하겠다고.
우리는 문밖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그 맛있는 것을 왜 잡숫지 않느냐며 발을 동동 굴렀지.
나중에 어느 기자가 그때 이야기를 기사로 써서 한동안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지요.

   1. 북어 껍데기에 양념한 소고기를 얹어 지진 다음 맑은 장국에 끓여낸 어글탕과 파가 많이 들어간 궁중식 육개장 2.한입 크기로 썰어 지진 두부 사이에 양념한 고기를 끼우고 열십자로 묶어 끓여내는 두부전골 3.만드는 이도, 먹는 이도 모두 정성을 기울여야 비로소 그 음식의 묘미를 맛볼 수 있는 구절판

북어 껍데기에 양념한 소고기를 얹어 지진 다음 맑은 장국에 끓여낸 어글탕과 파가 많이 들어간 궁중식 육개장.
한입 크기로 썰어 지진 두부 사이에 양념한 고기를 끼우고 열십자로 묶어 끓여내는 두부전골.
만드는 이도, 먹는 이도 모두 정성을 기울여야 비로소 그 음식의 묘미를 맛볼 수 있는 구절판.

붉은색 주칠원반朱漆圓盤과 곁반에 12첩 반상을 차렸다. 밥을 뜻하는 ‘수라’는 흰쌀밥인 백반白飯과 팥물들인 홍반紅飯을 동시에 놓는다. 국도 곰국과 미역국 등 두 가지. 원하는 음식을 골라서 드실 수 있도록 하려는 배려이다. 기름기 있는 음식과 그렇지 않은 음식을 따로 집을 수 있도록 수저도 역시 두 벌을 놓는다. 간장, 겨자장, 초고추장 등 장 세 가지와 배추김치, 송송이(깍두기), 나박김치 등 김치 세 가지를 놓았다. 찌개를 뜻하는 조치도 두 가지. 생채, 숙채, 갈비찜, 전유어, 너비아니, 두부전골, 구절판, 어채, 장과(장아찌), 편육, 조리개(조림), 수란, 구이, 젓갈 등 그야말로 산해진미가 모두 올라가는 상차림.

학자에 따라 12첩 반상에 올라가는 음식의 개수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은 꽤 분분하다. 지금까지는 수라, 탕, 조치, 찜, 전골, 침채, 장류 등을 모두 기본 찬품으로 두고 나머지를 첩수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장을 제외하고 밥상에 오르는 모든 찬품을 모두 찬품의 숫자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학자들은 수라와 탕도 찬품으로 간주한다. 역사적 사료가 많이 부족하고 특히나 구한말 자료가 더욱 부족한 상황이라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할 부분이다.

12첩 반상이라고 해서 매번 똑같은 음식을 차리지는 않지요.
선생님은 격식도 중요하지만 제철 재료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려고 항상 애쓰셨어요.
생선만 해도 여러 가지를 쓰셨지. 가장 흔한 것은 민어였는데 우리가 학생일 때는 잘 사는 집이 아니어도 민어를 많이 먹었지.
70cm 이상 크기인 민어 한 마리면 20명 정도가 수업 잘 할 수 있었어요. 도미, 조기, 병어, 대구, 낙지 등도 주로 쓰셨고.
고등어나 홍어는 흉한 생선이라고 절대 쓰시지 않으셨어요. 음식의 품격을 중히 여기셔서 구절판에 숙주를 넣는 것을 아주 싫어하셨지요.
흰색 재료를 쓰려면 전복을 곱게 썰어서 살짝 볶아 쓰거나 도라지를 쓰라고 하셨어요. 밀쌈을 먹을 때도 쌈을 다 싸서 간장에 찍어먹지 않아요.
반드시 초간장이나 겨자장에 작은 수저를 곁들이고 그걸 떠서 밀쌈 재료 위에 뿌린 후 싸도록 했지.
그래야 먹는 모습도 깔끔하고 입 안에서 간이 제대로 맞게 된다고 하셨지요.

 

재료와 조리법이 겹치지 않는 12첩 반상. 무질서하게 보여도 채소 반찬과 고기 반찬 등은 모두 정해진 곳에 모아서 올리는 것이 특징

재료와 조리법이 겹치지 않는 12첩 반상. 무질서하게 보여도 채소 반찬과 고기 반찬 등은 모두 정해진 곳에 모아서 올리는 것이 특징이다.

 

육개장만 하더라도 한희순 선생님에게 배워서 숙명여대에만 내려오는 비법이 있어요. 우선, 소고기만 넣지 않고 내장을 다양하게 씁니다.
소고기는 양지머리나 사태를 쓰고 양, 곤자소니, 곱창 등을 꼭 넣어요.
소의 내장 중에서도 끝 부분에 가까운 곤자소니는 유난히 쫄깃쫄깃한데 푹 무르도록 고아 납족납족 썰어 넣으면 참 맛있지요.
궁중식 육개장에는 고사리나 도라지를 쓰지 않고 파를 듬뿍 넣습니다.
푹 무르게 삶은 고기는 먹기 좋은 크기로 찢어서 매운 양념에 무쳐 국에 넣지만 파는 양념에 무치지 않고 그대로 넣지요.

배숙은 배를 8등분해서 쓰는데 반드시 모서리를 예쁘게 도려서 모양을 낼 것.
도미찜을 할 때는 반드시 지느러미를 깔끔하게 잘라내고 써야 하고, 비늘 손질을 끝낸 후 칼집을 넣고 소금을 뿌려야 나중에 살이 예쁘게 벌어지고 간도 잘 배니 꼭 순서를 기억할 것.
북어찜을 할 때 떼어놓은 대가리는 상하지 않도록 망에 넣어 보관했다가 물을 붓고 폭 끓여서 걸러 김치 국물로 삼을 것.
음식은 반드시 소담하게 담을 것. 편육을 접시에 담더라도 예쁘게 모양내듯 줄 세우지 말고 소담하게 쌓듯이 담을 것.

    1오방색 고명으로 장식한 도미찜. 칼집을 넣고 미리 소금을 간을 해야 살집 사이가 벌어져서 장식하기가 좋다. 2.늦가을부터 겨울까지 최고의 별미인 유자화채 3.모난 데 없이 8등분한 배의 모서리를 깔끔하게 정리한 후 통후추를 박아 달콤한 국물에 띄운 배숙

오방색 고명으로 장식한 도미찜. 칼집을 넣고 미리 소금을 간을 해야 살집 사이가 벌어져서 장식하기가 좋다.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최고의 별미인 유자화채와 모난 데 없이 8등분한 배의 모서리를 깔끔하게 정리한 후 통후추를 박아 달콤한 국물에 띄운 배숙.

송송이(깍두기)는 크게 썰기보다 작게 써는 것이 좋다고 하셨어요. 작게 써는 것은 흉이 아니지만 크게 써는 것은 흉이 된다고요.
배추김치는 반드시 동그란 모양을 살려서 썰어 담았지요.
이조궁정요리통고를 가지고 수업을 하실 때면, 중간에 오류가 있다며 꼭 짚고 넘어가시지요.
그걸 책 귀퉁이에 꼭 받아 적어가며 배웠지요. 60년 전에 받았던 가르침의 내용은 공책 한 권을 그 자리에서 채워도 모자를 만큼 차고 넘쳐요.

1970년도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전희정 교수는 2년 후 스승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다시 뵐 수는 없었다고 한다. 왕과 왕비의 수라를 준비하는 궁인이었지만 어떤 재료든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활용하는 지혜를 알려주고자 애썼던 스승. 궁인 특유의 단정한 차림새와 꼿꼿하고 간결한 자세와는 별개로 “대구가 병어에게 장가 보내준다 하니까, 병어는 화가 나서 입이 뾰족해지고, 대구는 신이 나서 입이 헤벌쭉해졌더란다” 라는 우스갯소리도 곧잘 해주시던 스승이었다.

육 한 가지만 하더라도
재료에 따라 편육, 제육, 우설편육, 족편, 족장과 등으로 나뉘고
꿀, 계피, 정향, 대추고 등을 더하면 약보다 귀한 후식인 전약을 만들 수 있어요.
녹두 한가지만으로도 제물묵, 청포묵, 황포묵이 나오지요.
곱게 내린 녹말을 물에 개어 중탕으로 얇게 펴 익히면 단옷날 절식인 창면을 맛볼 수 있고요.
아직은 귀한 음식 배우기를 원하는 제자들과 함께 옛 조리서 속의 숨은 음식들을 재현하고,
요즘 사람들 취향에 맞는 조리법을 접목시켜볼 생각을 합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등에서 공부도 하고 생활도 해봤으니 그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한식의 모습을 좀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이라도 기운이 남아 있을 때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음식, 참 곱고 귀하잖아요.

     1.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음식연구원 현판 2. 한국음식연구원들의 모습

참고

전희정(2014) 「한국의 전통음식과 세계화」, 교문사

김용숙(1987) 「조선조 궁중풍속연구」, 일지사

김명길(1977) 「낙선재 주변」, 중앙일보사

한복진(2005) 「조선시대 궁중의 식생활문화」,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한희순, 황혜성, 이혜경(1957) 「이조궁정요리통고」, 학총사

김상보(2011) 「다시 보는 조선왕조 궁중음식」, 수학사

글:이명아(숙명여자대학교 한국음식연구원)

사진 · 영상:박명화

영상 편집:김초영

한희순 상궁님이 숙명여자대학교에 와서
가르치게 된 동기는 엄비 세운 학교이기 때문에 오시게 된 거예요.

구절판 관련된 옛날이야기 인데요.
우리 학교에 펄 벅 여사님이 오셨을 때
이 구절판을 이렇게 만들었는데 그걸 보시고
물론 제 12첩 반상 다 이렇게 차렷지만 이 구절판을 보시고
너무 아름답다고 이걸 어떻게 먹느냐가 그래서
이제 총장님이 어떻게 먹는다는 설명을 다 이렇게 해 드렸는데
너무 아름답다고 다른 것만 다 잡수시고
이거를 건들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말씀을 우리가 듣고
옆 몰래 이렇게 보면서 '아이고 그걸 잡수셔야지 왜 안 잡수시나'
그러면서 수군수군 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조교 생활할 때
우리 한 선생님이 오셔서 밥상 다 차리고
우리 조교 생활할 때 큰 얘깃거리 였지요

이거는 뭐 하고 또 바꿀 수가 없어 어느 나라 사람들이든지 다 좋아해

한희순 상궁님이 숙명여자대학교에 와서 가르치게 된 동기는 엄비가 세운 학교이기 때문에
옛날 가정과의 과장이셨던 김병설 교수님하고 또 임숙재 총장님하고
의논을 하셔서 한상궁 님을 모셔다가 교육을 시키자 그래서 오시게 된 거예요.
다른 학교는 안 가셔요.

우리 학교 오셔서 쭉 가르치시다가
여기 오실 때는 그 별궁에서 택시를 타시고
교문에서 내리시면 우리가 이제 모시는 사람이 내려가서 모시고 와서 가르치시고
또 택시를 대절해서 그때는 자가용이 없을 테니까
택시로 모셔서 별궁에 모셔다드리고

두부 전골도 요새 두부찌개를 갖다 두부 전골이라고 그러거든
근데 두부 전골 하고 두부찌개도 잘 몰라 구별 못 해 사람들이
두부 전골 할 때는 요 고기 양념한 거를 두부 부친 거에다가 이렇게 싸서
선생님은 꼭 십자로 묶기를 원하셨습니다.
내 맘대로 이렇게 하나로 묶어 놓고
10자 같이 하면 눈을 막 흘기시면서 속이는 것처럼 그랬다고 걱정도 듣고..

저는 선생님께 뭘 많이 배웠느냐 하면 먹을 거를 버리지 않는 거
'대추 씨를 뭐하려고 안 버리시나?'
근데 그때만 해도 대추 씨를 이렇게 모아서 냉장고에다 넣어놨다가
그다음에 또 오시면은 또 대추 씨를 또 이만큼 합쳐서
냄비에다 넣고 물을 넣고
팔팔 끓여요. 그럼 거기에다가 찹쌀풀을 넣어서 대추 죽을 만들어요.
그런 거를 많이 배웠어요 선생님께.

내가 그러기 때문에 애들한테 먹는 거 못 버리게 하는 게
나도 모르게 선생님께 배운 걸 갖다 애들한테 자꾸만 강요하는지도 몰라

칼집은 이거 비늘 다 긁은 다음에는 넣는 거지
중국요리 해서 이렇게 다 (통째로 사용)하지만
우리는 다 잘라 그리고 여기도 다 자르고

교수님 한상궁 님을 처음에 입학해서 언제 보시게 된 거죠?
만나게 된 게 언제에요?

우리가 2학년 때 57년도
내가 56년도에 1학년 들어왔거든
그러니까 2학년 때서부터 우리는 2, 3, 4학년을 배웠거든
나중에 선생님한테 3, 4학년 가르치고
2학년을 황혜성 선생님이 가르쳤어
그러니까는 우리 때만 해도 2, 3, 4학년을 선생님께 배웠지

그러면 이 어글탕은 어떻게 배우게 되신 음식이에요?

어글탕은 북어, 황태를 살을 찢어서 그걸 국을 끓인다든지
무침에다 쓴다든지 하고
껍데기를 벗겨서
이 껍데기에다가 이렇게 밀가루를 소고기 다진 거 양념한 거 하고 두부 넣고
숮주 데쳐서 다진 거 그거를 이렇게 곱게 해서
이거를 여기(껍질 위)다가 놓고 얇게 이걸 펴요.
밀가루 칠하고 또 달걀 입혀서 전을 부쳐요.
전을 부친 다음에 잘라서 맑은장국 끓이는 데에 넣고 한번 우르르 끓이면 그게 어글탕이에요.
맛있죠, 선생님께 배운 다음에는
정말 껍데기만 나오면 많이 끓여 먹었지 버리지 않고
그래서 '어떻게 껍데기가 이렇게 맛있느냐'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죠.

한 선생님이 잘 드시던 음식은 뭐에요?
잘 잡숫던 거?
아 불고기 좋아하셨지
너비아니지
그거, 막 요새 그런 거 불고기 아니고……. 너비아니

임금님 수라상 차릴 때 나
반가 요리에서나 일반 음식 상차림에 있어서
원칙을 이야기하자면
주로 오른쪽에는 귀하다는 음식을 주로 놓고
왼쪽에는 채소 종류를 물론 귀한 거지만
채소 종류를 놓고 그렇게 돼 있거든요
이 앞에는 초간장이라든지 초고추장이라든지
겨자 간장 이라든지 그런 걸 놓고
제일 멀리서는 김치 놓고

이 책은 한희순상궁님하고 황해성 선생님하고
이혜경 선생님 세 분이 쓰셨는데
책이 없을 때 이게 처음에 나온 거라
아주 우리가 굉장히 귀하게 간직하고 있던 거죠

저는 70년도에 이제 영국을 떠나기 때문에 그때 돌아가시는 걸 뵙지 못하고
그런데 우리 학교 오셔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우리 선배님들 하고 우리는 굉장히 좋아했지요.

우리 학교 오시면 저 관악산 쳐다보고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염주 같은데 기도하고 그러시던 게 나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런 게 굉장히 내 머릿속에 지금까지 많이 남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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