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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남사록』)

감귤(『남사록』) 이미지
선조 연간에 어사(御使) 자격으로 제주에 파견되었던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제주와 제주민의 실정을 소상히 파악하고자 힘썼고, 그 자세한 내용을 『남사록(南槎錄)』이라는 책에 기록하였다. 이 책에서 김상헌은 “군역이나 전복을 따는 역 외에도 제주 사람들은 귤을 재배하고 진상하는 역, 뱃사람의 역, 말을 기르는 역 등 수도 없이 많은 고역에 시달렸다”고 적었다. 또한 “해마다 7, 8월이면 목사는 촌가의 귤나무를 순시하며 낱낱이 장부에 적어두었다가, 감귤이 익을 때면 장부에 따라 납품할 양을 조사하고, 납품하지 못할 때는 벌을 주었다. 이 때문에 민가에서는 재배를 하지 않으려고 나무를 잘라버렸다”고도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감귤을 진상하기 위해 제주민들이 감당해야 했던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공납된 감귤은 종묘제사에 천신(薦新)하였고, 왕실 잔치나 사신 접대, 그리고 관청과 신하들에게 내려주는 하사품 등과 같이 아주 특별한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감귤이 바다 건너 궁에 들어오게 되면 왕실에서는 제주목사의 공을 높이 치하해 삼베와 비단을 내려주었다. 또한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들을 상대로 감제(柑製), 혹은 황감제(黃柑製)라고 하는 임시 과거시험을 열고, 시험이 끝나면 유생들에게 감귤을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성적을 매겨서 황감제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생에게는 사제(賜第)라 하여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똑같은 자격을 부여해주었다고 한다(『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이처럼, 감귤은 왕실과 조정대신들에게 크나 큰 즐거움을 선사했지만, 이를 공납해야 했던 제주민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조선왕조가 몰락한 후 제주도의 감귤나무는 사실상 버려졌다. 식량작물이 아닌데다가 그간 감귤 공납으로 인해 큰 고통을 받아왔기에, 제주민들 입장에서는 더 이상 귤을 재배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1950년대 말에 이르러 귤이 고가에 팔리기 시작하면서 제주도에서 귤 재배가 다시 성행하게 되었고, 감귤나무 몇 그루만 있으면 자녀의 대학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하여 ‘대학나무’로도 불렸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제주도민들에게 그늘을 드리웠던 감귤나무가 한동안 그들에게 큰 수익을 안겨주었던 것이다(「탐라기행(7)」, <경향신문> 1956년 9월 9일)
제작자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집필자
양미경
발행기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저작권자
한국문화원연합회
분야
한식[식재료]
참고문헌
김상헌, 『남사록』
홍석모 저, 최대림 역, 『동국세시기』(홍신문화사, 2006)
「탐라기행(7)」, <경향신문>1956년 9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