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뛰기링크

한국음식문화 한식문화사전

한국음식문화

메뉴 열기, 닫기
한국음식문화
검색 열기,닫기

한식문화사전

검색어 입력

한식문화사전

한식문화사전

감자

감자는 가짓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로서 감자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 일대이고 감자를 한자어로는 북저(北藷), 북감(北甘), 토감저(土甘藷), 북감저(北甘藷), 마령서(馬鈴薯), 토두(土豆) 등으로 표기한다. 감자는 감저(甘藷)에서 변환된 단어인데 감저는 조선 후기 각종 문헌에서 고구마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식민지시기에 들어서 손진태(孫晋泰: 1900-?)는 「감저전파고」에서 고구마와 감자가 한반도에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다루면서 명칭에 대한 문제 역시 다루었다. 손진태에 따르면 문헌상에는 감저라 표기되는 고구마이지만 하지만 속어(俗語)에서는 마령서를 감자라 한다고 했다. (손진태, 1941)
하지만 손진태 주장처럼 한반도 전 지역에서 감자가 현재 한국사회에서 통용되는 감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1944)가 조사 연구한 조선방언의 연구(朝鮮語方言の研究)에 의하면 식민지시기 감자라는 단어는 여러 지방에서 현재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감자와 고구마를 혼용하는 의미로 쓰였다고 봤다.
물론 다른 작물이기 때문에 고구마의 경우 왜감자, 당감자, 사탕감자 등으로 불렸고 감자는 하지감자, 북감자, 포리감자 등이라 지칭했다.(小倉進平, 1944)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감자라고 잘못알고 있지만 유명한 소설인 김동인의 감자에서 감자는 고구마를 가리킨다.(박현수, 2017.) 감자는 적어도 7000년 전에는 재배작물로 활용되다가 스페인이 남아메리카를 식민지 경영하는 과정에서 유럽을 시작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래리 주커먼 저 박영준 역, 2000)

감자 전래과정의 끄트머리에 한국이 있었다. 감자가 전래 된 방향에 대해서도 두 가지 전래설이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저자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은 <북저변증설(北渚辨證說)>에서 감자와 고구마에 대해 자세히 기록해놓으면서 북방전래설을 주장한다. 우선 이규경은 저(藷)가 자연재해에도 강하고 잘 자라기에 백성들이 저에 의지해 살아간다고 평하면서 저를 고구마를 가리키는 남저(南藷)와 감자를 지칭하는 북저로 구분한다. 그리고 감자에 대해서 모양은 작은 계란 같이 둥글고 그 껍질이 얇고 약간 누런 색을 띄며 감자의 속살은 부드러우면서 토란 같이 하얗다고 하였다. 그리고 감자 맛은 달면서도 담백하고 물기가 있다고 평했다.

이규경의 북방전래설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 감자가 들어온 시기를 순조(純祖)가 재위하고 있을 1824-1825년 사이이고 북쪽 지역에서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북쪽을 통한 감자 전래에 대해서도 2가지 설을 소개한다. 그 중 하나는 명천부(明川府) 사람으로 관상을 보는 김 모(某)가 청나라 수도 연경(燕京)에서 감자를 가지고 왔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인삼을 캐기 위해 조선으로 들어왔던 청나라인들이 산 속에서 지내면서 감자를 재배해 먹다가 밭이랑 사이에 남겨두고 갔다는 설을 기록했다. 이규경과 달리 남방전래설을 주장한 사람은 원저보(圓藷譜)의 저자 김창한(金昌漢: ?-?)이다. 김창한의 주장에 따르면 1832년 전라북도 해안에 영국 상선이 와서 1개월 간 머물렀고 이때 선교사가 감자 재배 방법을 알려줬다. 이때 김창한의 아버지가 감자 재배법을 배웠고 이를 통해 아들인 김창한이 감자 재배법을 책으로 쓴 것이 원저보 이다. (신병주, 2013) 이 두 가지 설 중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19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감자가 한반도로 전래 됐다고 추정할 수 있다. 감자는 19세기 이후 급속히 한반도에 보급되어 대략 1세기가 지난 1911년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한반도 내 감자 재배지는 11,303.7 정보(町步)였고 생산량은 22,893,066관(貫)을 생산했다. 이 중 한반도 내에서 함경남도, 함경북도, 강원도가 감자 재배면적과 생산량이 가장 많았고 특히 함경남도가 전체 감자 재배면적과 생산량의 전체 약 42%와 57%를 차지할 정도로 20세기 초부터 한반도 감자 생산 중심지였다.

감자는 식민지시기까지도 구황식품으로 많이 인식되었다. <동아일보> 1928년 8월 1일 기사에 따르면 전라북도 일대에 가뭄이 닥쳐 모내기를 하지 못한 지역도 적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당시 전라북도 농무과(農務科)에서는 가뭄 피해에 대한 대책으로 모내기가 불가능한 벼를 대신해 씨감자를 나눠줘 모내기에 실패한 논에 부족하나마 식량으로 삼도록 했다. 화전민을 다루는 기사들에 감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만큼 식민지시기에 감자는 화전민의 작물이자 먹거리로 인식됐다. 화전민과 감자 사이의 관계를 잘 묘사한 기록이 <동아일보> 1926년 6월 21일에서 같은 해 6월 28일에 끝을 맺는 「고해순례(苦海巡禮) 화전민생활조사」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는 조선총독부의 삼림령(森林令) 실시 이후 화전에 대한 단속이 엄격해지면서 팍팍해진 화전민들 삶을 살펴보자는 의미에서 함경남북도 일대를 다니면서 쓴 기획기사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화전민들은 조 귀리와 함께 감자를 많이 심어 1년 식량으로 삼았는데 화전민들은 감자를 다른 곡물들과 비슷하시기인 입하(立夏) 전에 심은 후 추분(秋分) 전에 수확했다. 식민지시기부터 많은 사람들이 감자 전분을 술 만드는 원료 감미료 및 공업용 원료 연료로 사용했다. 감자 전분의 쓰임새가 확장되면서 식민지 조선 감자전분은 오사카 지역으로 판매됐다. 이같이 다양한 용도로 쓰일 수 있던 감자 전분의 상품 가치는 일찍부터 주목받아 1915년 신문계(新文界) 26호에서 감자 전분을 채취하는 방법을 자세히 기술했다. 심지어 1930년대 신문기사에는 감자 전분을 이용해 유리와 비슷한 제품도 만들었고 그 제품이 실제 유리제품과 큰 차이가 없었다는 기사도 등장했다. 식량으로서 원료로서 이곳저곳에 쓰이는 감자이니만큼 조리방식도 다양하다.

조림, 튀김, 삶은 감자, 감자를 넣은 감자밥 등이 전국적으로 있고 한국 내에서 감자 생산지로 유명한 강원도 내 음식으로는 최근 전국적으로 판매되는 감자떡을 대표로 하여 일종의 범벅이라 할 수 있는 감자붕생이, 감자수제비, 감자경단 등의 음식이 있다.(농업진흥청, 2008)
제작자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집필자
이민재
발행기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저작권자
한국문화원연합회
분야
한식[식재료]
참고문헌
「고해순례(苦海巡禮) 화전민생활조사(1)~(8)」, <동아일보>1926년 6월 21-28일
<農産製造, 馬鈴薯澱粉의 製法> 신문계(1915), 1915
래리 주커먼 저·박영준 역 악마가 준 선물-감자이야기(지호, 2000)
박현수, 「감자와 고구마의 거리-김동인의 감자 재독」<민족문화사연구>(2017)
손진태, 「감저전파고」<진단학보>(1941)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신병주 조선평전(글항아리, 2013)
농업진흥청 한국의 전통향토음식3-강원도(농업진흥청, 2008)
小倉進平, 朝鮮語方言の 硏究下(岩波書店, 1944)·
연관 표제어 : 고구마